강화중앙교회 디아스포라


강화중앙교회와 하와이 이민, 그리고 독립운동


강화도에 감리교가 들어온 흔적을 따라가보니 흔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이 역사 속에 감춰져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정치적인 태도에서부터 강화도민들의 변화 등 한 나라의 역사이 굴곡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이 글에서는 강화의 여러 교회 중에서도 잠두교회, 오늘날의 강화중앙교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역사의 흔적을 소개합니다. 그렇다고 이 흔적이 강화중앙교회만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인천의 내리교회와 강화도의 교산교회, 홍의교회, 길직교회 등 다른 교회에서 시무하던 목회자들이 강화중앙교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교회를 일정시기 순환하면서 헌신하는 시무자들의 특성상 이 역사의 흔적은 강화중앙교회를 중심으로 몰아치는 소용돌이와 같습니다.

강화중앙교회의 시무자들과 교인들이 대한제국 독립 운동에 끼친 영향을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대한제국 국내에 끼친 영향, 또 다른 하나는 해외에서 끼친 영향입니다. 1900년대 시작된 강화도 지역의 감리교 교세확장으로 인해 개신교라는 새로운 사상이 지역사회를 이끄는 동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신식교육과 청년 운동이 일어납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사회가 변화되어갔던 것이지요. 노론 세력이 나라를 팔아먹는 동안 기존 정치세력에 지친 사람들이 개신교에 매력을 느끼고 일제가 나라를 점령하자 교회에 모여 독립운동을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를 받아들인 자들이 중심이 되어 개신교를 가져다 준 미국으로 떠나 디아스포라를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강화중앙교회에 남은 자들은 남은 자들대로 떠난 자들은 떠난 자들 나름의 독립, 구국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릅니다.

이 글의 시대적 배경은 강화도에서 감리교의 첫 세례가 있었던 1893년부터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입니다. 강화도에 교회가 세워지는 데에는 선교사의 역할도 있었지만 지역유지들이었던 양반계층의 개종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흥미로운 한 가문이 있습니다. 바로 김상임 가문입니다. 마을 훈장이었던 김상임이 감리교로 개종을 하고 나서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의 둘째 아들인 김우제는 감리교식 청년운동, 교육운동에 적극적인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김상임-김우제 부자는 우리 나라 최초의 부자 목회자입니다.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찾던 성재 이동휘가 바로 이 김우제 전도사를 만나 개신교를 받아들이고 독립운동의 단초를 얻게 되는데, 앱웟 청년회로 명명되는 감리교 청년회활동에서 이동휘는 청년과 교육이라는 모티프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후 김우제는 하와이로 떠나 하와이에서 조선인들을 위한 감리교 교회를 이끌고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보국회의 회장을 맡았습니다. 이 글의 제목이 강화중앙교회 디아스포라인 이유는 고향인 강화를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미래의 계획을 꾀했던 강화도 출신 김상임 가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찾지 못한 대를 이어간 다른 감리교 가문도 있을 것입니다. 감리교를 받아들여 새로운 삶을 꿈꾸었던 주민들을 이끌었던 할아버지 김상임에서부터 청년교육운동과 미주 독립활동에 열성적이었던 아들 김우제 전도사, 상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이 인정되어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손자 김동수 선생의 삶의 궤적은 주체적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강화중앙교회를 섬겼던 시무자들의 목회 성격을 알게 되면 당시 이 교회가 강화도에서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존스. 조원시趙元時(1867-1919)


조원시 목사와 한인 감리교인

1887년 파송돼 1888년 5월 감리교 남성으로는 네번째로 한국에 왔습니다. 1891년까지 배재학당 교사와 교장으로 봉직한 후 1892년 제물포 선교관리 책임자로 부임해 인천 내리교회 2대 담임목사가 됐고, 인천 영화학교를 세웠습니다. 이후 인천·강화·부평·부천·황해 연안·남양 등지의 선교에 힘쓰며 1903년까지 44개의 교회를 개척했고, 3천여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1893년 제물포에서 한국 최초의 신학 교육이라 할 수 있는 신학반을 열었고, 최초의 한글 찬송가인 <찬미가(1892)>와 한국 최초의 잡지 'Korean Repository', 한국어 최초 신학잡지 <신학월보(1900-1909)>를 발간하는 등 출판 분야에도 공헌했습니다. 1902년 하와이로 떠난 최초의 한인 이민자들을 주선하는 일에도 앞장섰습니다.


이승훈 세례

강화도에서 처음으로 개신교 신자가 탄생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승훈입니다. 인천에서 주막을 하던 이승훈은 존스 목사가 강화도에 들어올 수 없게 되자 어머니를 먼저 세례받게 하고자 존스 목사가 있는 배 위로 어머니를 업어서 모시고 옵니다. 1893년 여름 강화도 주민에게 최초로 감리교 세례가 베풀어졌습니다.


교세확장

감리교의 전파는 북서지역에서부터 남동쪽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남쪽으로 들어오는 길목은 강화유수에 의해 차단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존스 목사가 인천에서 배를 타고 강화의 북서쪽인 시루미(지금의 양사면)에서 선상세례를 베풀고 나서 김상임에 의해 교산교회가 지어졌습니다. 이후 홍의교회, 잠두교회(강화중앙교회) 순으로 설립되었습니다.


김상임

김상임(金商壬)은 1850년 5월 20일, 서사리 교항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경주 김씨의 후손으로 11세 때 동몽과에 응시해 수석합격하고, 38세가 되는 1887년 강화부 승부 초시(初試)에 등과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1894년 10월, 김상임은 45세의 나이에 존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습니다. 김상임은 이승환 모자에 대한 존스 선교사의 사려 깊은 행동을 본 이후 한문성경을 전해받고 읽는 가운데 자신이 찾던 ‘정감록’의 ‘십승지지’란 주요 비결이 바로 성경의 ‘십자가지도’임을 깨닫고 개종을 결심했습니다. 갑오(甲午), 을미(乙未), 병신(丙申) 3년 동안 세상은 급속도로 변모하고 있었고, 국운이 쇠함에 따라 백성들의 인심도 흉흉해지고 피난민도 늘었습니다. 1894년 정월, 동학란에 이어 2월에는 김옥균이 살해당했고 같은 해 6월에는 청일 두 나라 군함이 수원 앞바다에서 맞붙었습니다. 1895년에는 민비 시해사건이, 그 다음해인 1896년 병신년에는 고종 임금이 러시아 공관에 끌려가는 아관파천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때 사람들이 <정감록>의 십승지지를 찾으려 애썼던 것은 당연했습니다. 김상임도 그 중 한 사람이었는데, 한문성경 첫 글귀에서 그 답을 찾았던 것입니다. 김상임은 존스 선교사의 배려로 인천 내리감리교회에서 시작한 우각 신학회 1회 입학생으로 공부를 했고 평양의 신학회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02년 4월 김기범, 김창식 목사에 이어 감리회의 한국인 3대 목사후보가 됐으나, 목사안수를 몇 달 앞두고 전염병이 창궐한 마을의 심방을 갔다가 감염되어 55세를 일기로 소천하였습니다. 김상임의 개종은 개신교를 부녀자와 천민들이나 믿는 종교로 여기고 천시하던 주민들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교산교회는 기존 서민층과 가세한 양반층이 어우러진 균형적인 발전이 이루어졌고, 강화지역 지도급 인사들이 연이어 개종해 강화 전역으로 복음을 확장시키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김상임 전도사는 교산 감리교회 2대 담임자로 사역을 하고, 그의 장남 김홍제 전도사는 4대 담임자로, 그의 차남 김우제 전도사는 강화 중앙감리교회 3대 담임자로 목회를 하였습니다.


김우제

역사에는 김우제로 불린 사람과 김이제(Kim, E-Je)로 불린 사람이 있으나 이민사 박물관, 보훈처, 독립기념관에 확인해본 결과 둘은 한 사람입니다. 김우제의 '우'자(字)가 집 '우'宇, 어리석을 '우'愚로 표기된 경우도 있습니다. 김상임 전도사의 둘째 아들로 19세에 배재학당에서 수학하고 23세에 옙웟 청년회인 무어 청년회를 잠두교회에 창설해 청년활동을 민족운동으로 연결시켰습니다. 이때 성재 이동휘가 이 무어 청년회에서 독립운동의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성재 이동휘는 잠두교회에서 권사를 지냈습니다. 1903년, 1905년 하와이 농업이민단에 합류해서 하와이 농장에서 이민 목회를 했습니다. 이후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펼쳤고, 이준선생이 회장으로 취임한 국민 교육회를 발족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김동수 선생의 부친입니다. 김상임 전도사에서 김우제 전도사로 부자 목회자가 탄생했다면 대동보국회 김우제 회장에서 독립운동가 김동수 선생으로 이어지는 독립운동가 가문이 탄생한 것입니다.


강화중앙교회 청년회


1901년 11월 6일부터 1주일간 강화지방 사경회가 열렸을 때, 청년회를 조직하자고 결의한 것과 다음에 인용한〈신학월보〉기사를 살펴보면 1901년 혹은 1902년 무렵에 청년회가 조직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화지방 무어청년회를 조직함. 일천구백삼년 십이월은 곳 청년회 체임할 님긘 고로 임의 작정하야 임원을 다시 선정할 새 회장은 김경일 씨뇨 전도국장은 신학일 씨요 인제국장은 김애일 씨요 학문국장은 김부일 씨요 다정국장은 최계원 씨요 통신국장은 김우제 씨요 회계국장은 주선일씨요 모히는 일자는 일주간 목일 상오 십점종이오 회원 수효난 남녀 합 오십사 인이라 회원 수효에 자라남을 수년 젼과 비교하면 맛치 게자씨 한 알이 왕성함과 갓사오니 모든 영화를 하나님께 돌이옵고 더옥 만히 도와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강화의 엡웟청년회에는 '무어청년회'라는 명칭이 붙여졌는데, 이는 1901년부터 1904년까지 매년 한국에 나와 선교연회를 주재했던 무어(D. H. Moore) 감독의 이름을 딴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에 모여 모임을 가졌으며, 회원은 남·녀 합하여 54명이었습니다.

“3.1운동이 터지자 교회 중심의 청년들이 그 운동의 선두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전 강화가 한 부락도 빼지 않고 독립만세를 불렀고 수천 명이 잡혀서 볼기를 맞았고 그 중 선도자 유봉진씨 외에 20여명은 서대문 감옥에서 1년으로 부터 5년 까지 고생살이를 했는데 나는 그중 1년 측에 들어서 난생 처음으로 감옥살이를 해보았습니다.” <나의 정치 백서, 조봉암>



강화중앙교회



홍승하 목사

1902년 감리교가 파송한 대한제국의 첫 해외 선교사였던 홍승하 목사가 강화중앙교회 4대 담임목사였습니다. 아펜젤러와 교분을 가졌던 그는 용동교회(내리교회) 담임목사였던 존스 목사에게서 1901년 3월 세례를 받은 후 고향 남양에 내려가 전도하였습니다. 1903년 8월 존스 목사가 담임하는 인천내리교회는 하와이로 간 농업이주민촌에 홍승하를 해외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홍승하는 이교담, 우병길(후에 윤병구), 안정수, 박윤섭 등과 함께 1903년 8월 7일 한인사회의 단결과 독립운동을 위하여 신민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 받았습니다.


손승용 목사


잠두교회의 5대 담임목사를 지낸 손승용 목사는 독립신문 기자를 역임한 후 인천과 강화에 정착하여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전념한 감리교 목사입니다. 1906년 그는 민족정신의 씨앗을 뿌린 영화학교를 떠나 강화읍 잠두교회 담임을 맡았습니다. 1908년엔 조원시 목사 등과 함께 잠두의숙을 교회 부설 제일합일남학교로 다시 세웠고 이듬해엔 제일합일여학교를 세웠습니다. 손 목사는 합일학교 외에도 강화에서 활동한 약 5년간 교회부설 매일학교를 확산시키는 등 교육활동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가 강화에 왔을 때 5개 였던 매일학교는 3년 만에 17개로 늘어났고, 교동에서도 2개였던 매일학교가 같은 기간 13개로 확대되었습니다. 김우제 전도사와 마찬가지로 청년, 교육활동에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성재 이동휘가 보창학교 운동을 시작한 건 1905년입니다. 보창학교 운동의 중심이 감리교였고, 이동휘와 손 목사의 독립협회 시절 인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두 사람이 연계했을 거란 예상이 가능합니다. 이동휘가 전면에 나서 학교를 세웠다면, 손 목사는 교회를 기반으로 학교의 틀을 다지는 등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우제 전도사, 손승용 목사, 이동휘 권사. 모두 잠두교회 시무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를 위해 일할 청년들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이동휘


"동포여 예수를 믿으라.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길은 이 길밖에 없다. 그리고 자식을 교육시키라. 교육을 안 시키려면 차라리 낳지를 말라." 강화중앙교회에 재산을 헌납하고 '강화의 바울'이 된 그는 1904년, 민족운동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보창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고, 강화 전 지역을 다니며 민중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72개 학교를 세웠는데 32개는 교회 내에 자리 잡았습니다. 1907년 7월 일제가 군대를 해산하자 진위대원들과 잠두교회 교인들과 함께 의병 운동을 이끌었는데, 이때 잠두교회의 김동수, 김남수, 김영구 세 형제가 일제에 의해 처형당합니다.

"이동휘가 강조한 신앙을 통한 구국투쟁이 잠두교회 교인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렸고 이같은 배경을 가진 교회를 다닌 어린 조봉암이 민족애와 조국애를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소설가 이원규는 그의 책 <조봉암 평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강화중앙교회 순국터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저항하는 감리교인들의 민족운동은 구국기도회로 시작하여 다양한 항일 투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전덕기 목사는 상동교회 엡윗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많은 민족운동가들을 규합하여 국권 회복운동과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07년 경기도 이천지방 구연영 전도사는 교회 청년들로 구국회를 조직하여 민족 계몽운동을 벌이다가 아들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어 희생되었고, 같은 해 강화읍교회 김동수 권사도 의병운동과 관련되어 두 동생과 함께 일본군에 희생되었습니다.


길직교회


1919년 3월 18일 일어난 강화의 만세운동을 모의한 곳 (국내항일운동사적지). 1919년 3월 9일 오후 3시경 길직리 예수교회당에서 길직교회와 선두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돌아온 황도문과 조종환으로부터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에 관한 상황을 듣고 강화에서도 만세운동을 할 것을 제안하였고 이진형 목사가 부내면 신문리의 잠두교회와 의논하여 거사를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강화 기독교인들, 3.18 만세운동 주도



유봉진



강화초등학교 독립만세



3.1만세운동기념비



하와이 이민단

존스는 조선 교인들의 비참한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가뭄과 전쟁 그리고 관아들의 횡포로 편할 날이 없지만 하와이는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잘 살수있는 자유의 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는 마음껏 신앙생활을 할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미국에서 새로운 세계를 보아야 한다. 이민은 새로운 기회다’라며 교인들에게 노동이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내리교회의 젊은 일꾼들을 이민자 모집책으로 투입하였습니다. 교인 장경화를 하와이사탕수수조합이 이민자모집을 위해 파견한 테슬러 이사를 돕는 총무로 임명하고 1893년 시카고세계박람회에 다녀온 서용규와 박영규가 이민업무를 돕도록 하였습니다. 차차 교인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서 50여명의 내리교인들이 이민을 신청하였습니다. 이들을 주축으로해서 부두노동자 20명, 배꾼들과 상인, 30명 그리고 군인, 머슴, 학생 및 선비 등 120여명으로 구성된 제1차 이민단이 1902년 11월 이민선 갤릭(S.S.Gaelic)호를 타고 첫 이민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에 도착 첫 조선인 미국이민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하와이 이민자는 1905년 이민이 중단 (이민 중단 증언) 될 때까지 64회에 걸쳐 총 7천 4백 15명에 이르렀다(이민사박물관 자료에 의함) 물론 초기에는 기독교신자들이 많았지만 점차로 비신자들이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호레스 알렌이 이민의 문을 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면 존스는 이민을 성사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존스 목사는 이민자들의 신앙지도와 생활여건의 향상에도 관심을 가져 교회젊은이들이 이민단에 합류하여 각지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도록하는 한편 홍승하 전도사와 안정수 권사를 이들을 위한 선교사팀으로 조직하여 역사적인 미국파송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하와이에 한인교회를 세우고 이를 주축으로 이민자들이 흩어져 있는 각지역을 심방하며 신앙지도를 하였는데 이 교회가 하와이그리스도의교회로 후에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김이제

1903년 6월 14일 하와이 모쿨레이아 농장에서 전도사 김이제의 주례로 첫 예배를 보았으며, 같은 해 11월 10일 호놀룰루에 사는 동포들이 안정수, 우병길을 대표로 정하고 감리교회 감리사 피어슨을 만나 홍승하 목사의 지도로 '한인전도회'를 발족했습니다. 김이제는 오아후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참고: 하와이 역사


대동보국회

대동보국회는 1907년 3월 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동단결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회원 간의 친목과 복지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대동보국회는 ‘2대 주의’와 ‘3대 총령’을 제창하였는데, ‘2대 주의’는 천하에 공론을 환기하여 동양의 평화를 보유케 함이요. 안으로는 동포의 중심을 결합하여 한국의 안녕을 보전하려는 것이었다. ‘3대 강령’은 인민의 교육확장과 실업을 일으키는 일과 자치건설이었다. 대동보국회의 발기회원은 장경ㆍ김우제ㆍ이병호ㆍ유홍조ㆍ김마리사ㆍ윤응호ㆍ문양목ㆍ최윤백ㆍ장인환ㆍ변창수ㆍ김춘화ㆍ김홍균ㆍ송사원ㆍ양주은ㆍ백일규ㆍ이면식ㆍ방사겸ㆍ조성학ㆍ이학연ㆍ박도선ㆍ서택원ㆍ박창운ㆍ김필권ㆍ이성칠ㆍ김찬일 등이었다. 총무는 장경, 총회장은 이병호ㆍ백일규ㆍ문양목 등이 역임하였다. 대동보국회는 스탁톤ㆍ프레즈노ㆍ칼린ㆍ덴버ㆍ솔트레이크시티 등 5개 도시에 지방회를 설립하고 중국 상해에까지 대표를 파견하였다.


대한인국민회

1910년 2월대동보국회는 국민회와 통합되어 발전적으로 해체되었으며, 대동보국회와 국민회의 통합체로서 대한인국민회가 출범하였습니다. 1908년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에 의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저격의거를 계기로 일어난 재미 한인단체 통합운동의 결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공립협회(大韓人共立協會)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통합하여 1909년 2월 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하였습니다. 그 이듬해 2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가 국민회에 흡수됨으로써 대한인국민회가 출범하였습니다. 이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한인을 총망라한 단체로 구성하기 위하여 미주에는 북미지방총회를, 하와이에는 하와이지방총회를, 멕시코에도 멕시코지방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김동수

1923년 아버지 김우제(김이제) 전도사를 따라 상해로 가서 인성소학교(仁成小學校)·공시중학교(公時中學校)를 졸업하였다. 1934년 김구(金九)·장졔스[蔣介石]의 합의에 따라, 중국군관학교 뤄양분교[洛陽分校]에 특설된 훈련반에 노태준(盧泰俊)·안춘생(安椿生) 등 한국인 훈련생 90여 명과 함께 입대하여 1년 동안 군사교육을 받았습니다. 1936년 7월 중국 육군 제25사단 견습 사관으로 군무를 수련하였으며,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8월 난징[南京]으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습니다. 1938년 3월 창사(長沙)에서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김인(金仁)·이하유(李何有) 등과 함께 중국인을 포함한 약 50명의 특수공작대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리고 적 점령 지구인 상해에 파견되어 정보수집·선전·초모공작 등을 전개하였습니다. 1939년 11월 한국 청년만으로 전지공작대(戰地工作隊)를 조직하여, 나월환(羅月煥)을 대장으로 하고 자신은 부대장에 취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