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규의
일대기는 한국근대교육역사다
일제시기부터 한국전쟁까지

야자 이만규(李萬珪, 1888-1978)
이만규는 교육자, 행정가, 정치가였다.
강원도 원성군 간현에서 출생하였으며, 1893년에서 1907년까지 고향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한성사범학교에 들어가지 못해서 1907년 4월
경성관립대한의원부속의학교에 입학, 1910년 8월 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이만규는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체험하면서
뜻한 바가 있어 같은 해인 1910년 9월에
서울 상동교회의 부속기관인 서울 상동청년학원 교사로 부임하였다.

연도와 사건

이만규의 생애와

주요사건

1

이만규 7세

1895년
교육입국조서

2

이만규 35세

1923년
민립대학설립운동

3

이만규 50세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발표

4

이만규 54세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

5

이만규 58세

1946년
국대안 파동

6

이만규 62세

1950년
인민군환영대회

송도고보 since 1913

윤치호와
이만규

윤치호가 교장을 맡은 한영서원(송도고보)에 부임. 이만규의 근대적 사고방식, 선진사회에 대한 열망과 조선에 대한 실망은 윤치호의 행적과 흡사하다.

상동교회청년학원 since 1910

남궁억과
이만규

둘은 상동학원에서 만났다. 남궁 억의 역사서 저술, 여성과 가정에 대한 관심은 이만규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배화학당에서 함께 교편을 잡았다. 이만규는 리틀 남궁 억이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남궁 억을 닮았다. 교육자 이만규는 남궁 억이 역사서를 저술했던 것처럼 '조선교육사'라는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

송도고보 창가사건과 3.1운동 since 1919

송도고보에서
이만규

창가사건과 3.1운동으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 때 문제의 심문조서(오른쪽)가 작성되는데 이 조서에서 이만규는 '조선의 독립에 희망이 없다'고 하였다. 조선민중에 대한 실망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는 개성에는 일할 사람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1920년에는 여광이라는 잡지를 출판했다.



배화학교 since 1926

배화학교에서
이만규

이만규의 여성에 대한 관심은 그의 기독교 신앙에 기인하기도 한다. 이점은 '가정독본'을 저술한 데에서도 드러난다. 배화학교에서 그는 좌파적 성향의 민족주의 교사들과 미군정에 대항했고 해직되었다.

정치인 이만규 since 1946

여운형과
이만규

1914년 개성에서 만난 여운형과 교우하면서 해방후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고 본격적으로 좌파민족주의 정치인으로 변신하였다. 여운형투쟁사(오른쪽)도 이만규의 저서다. 이만규는 북한의 김일성 대학을 시찰하고 북의 교육환경에 매력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그리고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되고 월북했다.

사회주의 체제 since 1950

김창준과
이만규

한국 전쟁시 남궁 혁 목사(위) 등 기독교 목사들이 납북되던 시국에 이만규는 김창준 목사(아래)와 함께 남한의 목사들을 북조선으로 회유하였다.


이만규
한국근대교육사
연구

한국의 교육가 정치가 이만규

이만규는 조선 교육과 사회의 선진화를 생각했던 선구적 교육자였습니다

그에 대한 논란은

당시의 사회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우리가

함부로 정의내리기에 어려운 면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