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고보 since 1913
윤치호가 교장을 맡은 한영서원(송도고보)에 부임. 이만규의 근대적 사고방식, 선진사회에 대한 열망과 조선에 대한 실망은 윤치호의 행적과 흡사하다.
상동교회청년학원 since 1910
둘은 상동학원에서 만났다. 남궁 억의 역사서 저술, 여성과 가정에 대한 관심은 이만규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배화학당에서 함께 교편을 잡았다. 이만규는 리틀 남궁 억이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남궁 억을 닮았다. 교육자 이만규는 남궁 억이 역사서를 저술했던 것처럼 '조선교육사'라는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
송도고보 창가사건과 3.1운동 since 1919
창가사건과 3.1운동으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 때 문제의 심문조서(오른쪽)가 작성되는데 이 조서에서 이만규는 '조선의 독립에 희망이 없다'고 하였다. 조선민중에 대한 실망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는 개성에는 일할 사람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1920년에는 여광이라는 잡지를 출판했다.
배화학교 since 1926
정치인 이만규 since 1946
사회주의 체제 since 1950
한국의 교육가 정치가 이만규
이만규는 조선 교육과 사회의 선진화를 생각했던 선구적 교육자였습니다
그에 대한 논란은
당시의 사회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우리가
함부로 정의내리기에 어려운 면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