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9.


무엇이 나를 하늘에 오르게 했는가?


  2011년 12월. 경량 항공기 조종 훈련을 받고 운항 자격을 취득하는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었다. 현재까지의 비행 시간은 30시간. (단독 비행 5시간)   비행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11년 6월. 하지만 이것은 2010년 초에 시작한 ‘인문지식의 시각화 기술 연구/훈련 프로그램’의 마지막 과제로 수행한 것이니, 2 년짜리 프로젝트의 마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무엇이 나를 하늘에 오르게 했는가?


  1. 하이퍼미디어 콘텐츠 개발 방향의 모색


  1) 아나로그 vs 디지털


  2010년 봄, 연구원의 직원 두 사람과 함께 전라남도 장성, 영광 지역을 찾았다. 출장 목적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수록하기 위한 지방 문화재 사진 촬영. 동행한 사진 기사 유남해 선생이 열심히 대상물의 클로즈업 사진을 찍고 있을 때, 나는 카메라를 둘러매고 언덕 위에, 담 위에, 지붕 위에, 심지어는 나무 가지에 올라 주위를 살폈다. 내가 카메라에 담고 싶어 한 것은 ‘사물’이 아니라 ‘공간’이었다.

  나는 그 즈음 6년째 수행해 온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편찬 사업의 결과물(콘텐츠)을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지난 5년간의 노력에 의해 텍스트 상의 오류를 줄이고 형식적 통일성을 부여하는 일은 어느 정도 발전이 있었다. 하이퍼 링크, 전자지도, 모바일 서비스 ...... 최신 정보 기술의 접목도 선구적인 성과를 보였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 안에 담긴 콘텐츠. 그것은 내가 보기에도 여전히 재미가 없었다.

  여기서 ‘재미’라고 하는 것은 자극적인 흥밋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급 지식 콘텐츠가 좇는 재미는 그 대상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른바 ‘아는 재미’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독자를 열광시킨 이유는 그 책을 읽음으로써 고대 로마 사회를 눈에 그리듯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사 한 편의 분량이 원고지 5매 내외에 불과한 백과사전 형태의 콘텐츠에서 텍스트만을 가지고 독자에게 ‘아는 재미’를 선사하는 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자 텍스트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기사 한 편의 양은 작을지라도 키워드 사이의 하이퍼 링크를 통해 관련 있는 기사 사이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준다면, 독자는 자신의 호기심이 꽂히는 방향대로 하이퍼텍스트의 바다를 항행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얻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멀티미디어는 전자 텍스트 상에서 대상에 대한 독자의 온전한 이해를 돕는 더욱 효과적인 장치이다. ‘눈에 보이는 듯 묘사’하기보다 직접 눈으로 보게 하고, ‘귀에 들리는 듯 설명’하기보다 직접 귀로 듣게 하는...... 멀티미디어와 하이퍼텍스트가 결합된 하이퍼미디어 상에서 독자는 감성의 날줄과 지성의 씨줄을 교차시켜 느끼면서 이해하는 묘미에 빠져들 수 있다.

  나의 설계와 지휘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디지털 콘텐츠가 그러한 수준의 재미를 독자에게 제공하는가? 아니라면, 개선의 실마리는 어디에서부터 찾아야 하는가? 그때까지의 편찬 사업을 통해 축적된 향토문화전자대전 콘텐츠 가운데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은 사진과 동영상으로 대표되는 시각 자료 부문이었다.

  디지털 콘텐츠 상에서 사진이나 동영상이 대상을 감각적으로 파악하는 데 충분한 도움을 준다면, 텍스트가 담당해야 하는 역할, 그것에 요구되는 수준이 명확해질 수 있다.  구구한 설명 필요 없이 대상을 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해는 감각적인 멀티미디어 데이터에 맡기면 된다. 텍스트를 통해서는 현재의 모습 속에 남아 있지 않은 과거의 자취를 돌아보고, 보이는 것 이면에 있는 의미와 가치를 찾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는 다른, 매우 다른 상황이었다. 대상만을 담으려한  ‘인증 사진’들은 그 이미지가 천편일률적이어서, ‘이곳이 그곳이구나’하는 느낌과는 턱없이 멀었고, 사진의 영상미를 느낄 수 있는 것도 거의 찾기 힘들었다. 한 지역에서 수천 장의 영상물을 제작하다 보니 사진 한 장 한 장에 정성을 담지 못한 결과라서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을 어떻게 찍어야 하는가’라는 지침이 없거나 그 제시가 잘못된 데에 있었다.

  나는 바로 이 사업을 위해 우리 부서의 연구원들에게 일 년 이상의 시간을 주고 이 지침을 만들도록 했었다. 나름대로 대상의 유형에 따라 촬영자가 소홀히 하지 말아야할 요건들을 정리하는 성과는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지침은 ‘디지털 콘텐츠’의 제작이라는 개념을 거의 담아내지 못했다. 책이나 방송 영상과 같은 아나로그 간행물의 제작 지침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간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영상 자료에 대한 나의 실망감은  아나로그적인 지침을 주고, 디지털적인 결과를 기대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나로그적인 영상과 디지털적인 영상의 차이는 무엇인가? 요즈음은 99% 이상의 영상물이 디지털 장비로 제작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만들어지는 산출물들이 바로 디지털적인 영상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적인 영상물이란 디지털 환경에서 최적의 효과를 드러낼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을 말한다.

  텍스트를 가지고 말하자면, Linear Text와 Hyper Text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나로그 매체에서는 무조건 위에서 아래로, 앞에서 뒤로 읽어 나아가야 했지만, 디지털 매체에서는 의미의 연관성을 찾아 지구 곳곳에 있는 수천 곳의 웹 페이지를 돌아볼 수 있다. 그 사이에 각각의 웹 페이지에 담긴 조각 지식들이 연결 고리를 만들어 내가 알고 싶어 했던 것의 총체적인 면모를 드러내 주는 것이다.

  사진 한 장, 동영상 한 클립을 가지고는 아나로그적인 것과 디지털적인 것의 차이를 말할 수 없다.  여러 개의 모노미디어 영상물이 문맥을 만들면서 조합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 독자에게 대상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감동을 줄 수 있을 때 그것을 디지털적인 영상이라고 한다. ‘하이퍼미디어(Hyper Media)'라고 이름하는 이러한 형태의 조합은 디지털 환경에서만 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장소감(Sense of Place)


  향토문화전자대전과 같은 지역 문화 백과사전의 하이퍼미디어 콘텐츠가 추구하는 목표는 한 마디로 ‘장소감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장소감’(Sense of Place)이란 물리적인 공간과 함께 그 장소에 깃든 문화적 사회적 의미가 함께 어우러져서 만들어 내는 감성을 말한다. 뛰어난 사진 작가의 작품이라면, 한 컷의 사진 속에 그곳의 특별한 장소감을 담아내는 것도 가능하리라. 하지만 방대한 규모의 디지털 콘텐츠를 모두 그런 식으로 제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의 연구원들과 제작 협력 사업체 직원들이 이해하고 따라올 수 있는 수준의 ‘하이퍼미디어 제작 가이드라인’이 필요했다.

  2010년 1월부터 4월까지, 나는 향토문화전자대전과 디지털 버전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판을 위한 하이퍼미디어 콘텐츠 제작 방안을 강구했다. 앞서 언급한 지방 출사는 내 구상의 가능성을 현장에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장소감의 재현은 그 장소에 대한 이야기(story)가 전달된다는 것이다. 굳이 텍스트를 읽지 않고도 영상물을 보고 탐미하는 동안 그곳의 자연과 역사, 문화에 대한 느낌을 얻을 수 있다면 이것은 곧 이야기의 전달이자 장소감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란 단편적인 사실의 조각들이 맥락을 형성하면서 이어지는 것이다. 영상 자료들도 의미있는 연결 고리를 가지고 맺어지면 컷 하나 하나를 개별적으로 보일 때는 드러나지 않았던 ‘이야기’를 전달하게 된다. 하이퍼미디어는 그 유의미한 ‘맺어짐’을 이루내는 ‘조합의 기술’이다. 


  3) 문맥 구현자(Context Builder)


  나는 하이퍼미디어의 핵심 요소로서 다양한 모노미디어에 대해 ‘맺어짐’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을 ‘문맥 구현자’(Context Builder)라고 명명하였다. 종래의 아나로그 콘텐츠에서는 이 ‘문맥 구현자’의 역할을 오로지 텍스트만이 할 수 있다. 이야기는 글이 전하고 사진과 그림은 그 글의 이해를 돕는 ‘삽도’(揷圖, illustration)로서만 존재했다. 디지털 환경에서는 전혀 다른 형태의, 목적하는 바에 따라 훨씬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문맥 구현자를 찾을 수 있다. 전자지도(Map), 파노라마 영상(Panoramic View), 전자 연표(Time Line). 이 세 가지는 내가 가장 관심 있게 탐구하는 문맥 구현자들이다.

  어느 한 지역이 그 고장(그 나라, 또는 세계 속의)의 어느 곳에 위치하는지, 산과 강은 그곳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만나는지...... 전자지도는 이와 같은 지리적, 자연적 환경을 알게 할 뿐 아니라, 지점과 지점이 맺고 있는 공간적 연관성을 일목요연하게 보여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역사적 인물의 생가와 그의 묘소, 그가 강학하던 곳, 그를 모신 사당 등은 일정한 범위의 공간 속에 자리하는 경우가 많다.  전자지도는 그 공간의 문맥을 전달할 수 있다.

  방문자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대상물에 대해 공간적 연관성을 보이는 것은 파노라마 영상이 할 수 있는 역할이다. 누정(樓亭)과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산과 강. 사찰이나 서원, 향교의 건물 배치. 전각 내부의 4면의 모습 등 ...... 시선을 어느 한 곳에만 고정하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이 360°  전방위 영상은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파노라마 영상은 내가 KISTI(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1999. 6.-2004. 2. 재직) 시절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분야였다.  당시 KISTI에서는 과학기술정보 대중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가상과학박물관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세계 각처에서 수집한 어패류의 사진을 한 전시실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일례이다. 이를 위해 전시실 내부를 돌아보게 하는 Surround View와 전시물 하나를 360° 돌려 가면서 보게 하는 Rotating View를 제공했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인터넷 속도와 플러그인 S/W의 부하는 끔직스러울 정도여서 실용화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을 전혀 다르다. Full Frame DSRL의 최고 해상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실시간 온라인 서비스를 할 수 있는 솔루션이 이미 상용화 되었다.)

  내가 전자연표(Historical Time Line) 또는 타임 캡슐이라고 명명한 기능은 어느 한 공간을 설명하는 콘텐츠 상에서 지금은 보이지 않는 과거의 모습과 지나간 사실을 하이퍼 링크 형태로 연결해 주는 것이다. 앞의 두 가지가 대상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적 문맥을 찾는 것이라면 이것은 관련 사실들 사이의 시간적 문맥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지도(Map), 파노라마 영상(Panoramic View), 전자 연표(Time Line), 이 세 가지를 ‘문맥 구현자’(Context Builder)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기 자신을 보이는 기능보다도 다른 미디어에 담긴 콘텐츠들이 서로 어떠한 관계(공간적/시간적 연관 관계)에 있는지를 보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 이 세 가지가 진정한 문맥 구현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관계성을 보일 대상의 성격에 따라 신중하게 선택되고 구현되어져야 한다.


  4) 파빌리온(Pavilion)


  문맥 구현자를 중심으로 사진, 동영상, 파노라마 영상, 음향, 텍스트 등 다양한 모노미디어 데이터가 패키지로 엮여져서  ‘이야기’(Story, 관계에 대한 이해)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을 ‘파빌리온’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파빌리온’(Pavilion)이라는 용어는 테마 파크의 개별 전시관를 그렇게 부르는 데서 착안하여 채용한 것이다.  한 지역의 향토문화전자대전이 그 지역의 자연과 역사, 문화를 종합적으로 보여 주는 디지털 테마 파크라고 한다면, 파빌리온은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관련된 자료를 조직화하여 보여 주는 작은 단위의 전시관이다. 전시관 내의 전시실에 해당하는 개념은 ‘신’(Scene)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림 1] 파빌리온(Pavilion)의 개념


  향토문화전자대전의 멀티미디어 데이터를 재미없고 천편일률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게 된 원인 중의 하나는 모든 시청각 자료를 항목 기사와 직접 1:1 매핑시키로도록 한 제작 지침이었다.  무덤 기사에는 무덤 사진이 있고,  인물 기사에는 인물 영정 사진이 있고, 새로 지어진 기념관 기사에는 기념관 건물 사진이 있지만, 그것들을 종합적으로 연계해서 볼 수 있게 하는 콘텐츠는 찾아 볼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멀티미디어 콘텐츠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해 내게 하기 위해서는 시청각 자료와 텍스트 항목 기사의 1:1 연결 구도를 깨뜨릴 필요가 있었다. 나는 파빌리온을 매개로 텍스트 데이터와 멀티미디어 데이터가 관계를 맺도록 하는 새로운 연계 구도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이 구도 하에는 그 지역의 문화를 대변해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주제를 찾아내는 일이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된다. 그리고 그 주제에 관한 자료들을 촬영, 수집하여,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접할 수 있는 가상 전시관(파빌리온)을 구현하는 작업이 뒤따르게 된다. 개별 항목 기사가 필요로 하는 멀티미디어 자료(삽도 성격의 자료)는 이 전시관 안에서 끌어다 보이면 된다.


[그림 2] 텍스트 기사와 시청각 데이터의 연계 방식 (기존 모델)




[그림 3] 파빌리온을 매개로 한 텍스트 기사와 시청각 데이터의 연계 (새 모델)


 이 분야 업무에 종사하는 연구원들과 협력 제작 사업체에는 영상 자료 제작에 관한 새로운 지침이 주어졌다. “자료와 자료의 연계를 통해 자료에 담긴 대상물들의 의미와 문맥이 드러나게 하고 그것을 통해 현장의 장소감을 전달할 수 있게 한다.” “영상 자료는 대상물의 형상을 담는 데에 머물지 않고, 대상물을 중심으로 주변을 보는 시각, 주변에서 대상물을 보는 시각을 도입한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2. 시각화 기술의 추구


  1) 사진(Photography)


  인문 지식을 하이퍼미디어 콘텐츠로 재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 분야의 전문 지식이 결합해야 한다. 첫째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인문지식 영역, 두 번째는 그것을 담을 플랫폼을 제공하는 정보기술 영역, 세 번째는 읽어서 이해하는 지식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지식으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시각화 기술의 영역이다. 디지털 세계의 시각화 기술은 전통적인 사진 기술 영역에서 축적되어 온 것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디지털 환경에 부합하는 시각 콘텐츠의 제작 방향을 모색한 나의 두 번째 프로젝트는 내 스스로 사진을 이해하고, 전문적인 사진 촬영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2011년 9월부터 6개월 동안 강남의 사진 학원에서 매주 두 차례 3시간씩 사진 제작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내가 왜 직접 카메라를 들어야 했는지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26년 전 조선왕조실록을 디지털화 하기 위해 내가 직접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어야 했던 것과 유사하다. 세상에는 인문학자도 많고 정보기술자도 많았지만 인문학 지식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고급 정보기술을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동원동 주택을 지으면서 설계자와 시공자의 완벽한 분업 체제를 경험하고 감탄한 바 있다.  설계자는 시공자에게 설계 도면을 건넸고, 시공자는 설계 내용을 그대로 좇은 건물을 지어냈다. 내가 종사하는 디지털 세계의 일도 이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감동적인 영상을 담은 인문지식 하이퍼미디어 콘텐츠를 나를 대신해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은 불행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세상에는 사진 잘 찍는 사람도 많고, 컴퓨터 시스템 구현을 잘 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만 이 두 부류의 사람이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기는 정말 어렵다.

  모든 일을 나 혼자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나의 일을 설명하고 협업을 이끌어낼 수 있는 역량은 내 스스로 갖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그들의 일, 그들이 잘 하는 것, 그들이 어려워 하는 것을 깊은 수준까지 알고 있어야 한다.

  6개월간의 사진 교육은 그 점에서 정말 유익했다. 중학생 때부터 라이카 필름 카메라(Leica CL)를 다루었던 경험이 있어서 촬영 기술을 익히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작품성 같은 것은 처음부터 추구하는 바가 아니었다. 교사와 동료, 사진을 업으로 하거나 앞으로 그러려고 하는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사진의 세계와 그 세계가 추구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2) 항공 사진(Aerial Phtography)


  사진에 대한 공부를 하는 동안, 학원 수업의 범위를 넘어서서 사진학의 성과와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는 여러 가지 응용 분야로 관심의 폭을 넓혀 갔다.  그 가운데 나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온 분야는 항공 촬영 기술과 파노라마 사진 기술을 접목한 항공 VR(Aerial Virtual Reality)이었다.

  상하 사방 360°의 영상을 한꺼번에 담아내는 파노라마 사진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왔고, 본격적으로 촬영 훈련을 시작하면서 이를 위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도 완비하였다. 파노라마 사진을 가상 현실(Virtual Reality) 프로그램으로 재현해 내는 소프트웨어 개발 도구도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에게 더해지는 열망은 좀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담아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곳곳에 유적으로 남아 있는, 이른 바 ‘누정’(樓亭)으로 분류되는 건축물이 있다.  경치가 좋은 곳이면 거의 예외 없이 이 누정이 세워져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데 많은 누정 가운데 어떤 것이 더 훌륭한 것이냐를 정하는 데에는 하나의 분명한 기준이 있다. 건축물의 크기나 외관의 화려함이 아니다. 그곳에서 바라보고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자연의 규모의 얼마나 되느냐가 그 척도라고 한다.  그래서 이름난 누정은 거의 예외 없이 트인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하였다.

  옛날에는 지형에 의존하여 주변보다 높은 곳에 올라가는 방법만이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길이었다.  오늘날에는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지표면에서 150m(약 500 feet) 정도의 높이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한 마을의 자연적, 지리적 입지에서부터  농사 일의 진행 정도, 그 마을에 있는 갖가지 시설물과 유적지 등을 확연하게 살필 수 있다.  이 때 카메라 5 대를 연동시킨 항공 VR 촬영 장비를 사용하여 360° 전방위의 영상을 담아내면, 직하(直下) 지점을 중심축으로 반경 수십 Km까지를 모습을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재현해 낼 수 있게 된다.


  3) 3차원 가상 현실


  항공 사진(Aerial Photo)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예전에는 단순히 게임 소프트웨어의 일종으로 생각했던 모의 비행(Flight Simulation) 소프트웨어의 잠재력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지금 나의 컴퓨터 속에 어느 한 마을을 지표 고도 150m 상공에서 촬영하여 제작한 다섯 종류의 시각적 콘텐츠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첫 번째 것은 가로 세로비 3:2 프레임 속에 들어온 영상만을 담은 스틸 컷,  두 번째 것은 같은 프레임으로 움직이면서 촬영한 동영상, 세 번째 것은 360° 파노라마 영상, 네 번째 것은 움직이면서 360° 이미지를 담아낸 파노라마 동영상.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것은 그 마을을 바라보는 위치를 상하 좌우 전후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한 3차원 입체 영상물이다. 이 다섯 종류의 콘텐츠가 모두 동일한 수준의 사실성을 담보할 수 있다면, 독자에게 가장 큰 흥미와 효용성을 안겨 줄 콘텐츠는 말할 필요도 없이 5 번째 것이다.

  3D FS(3 Dimensional Flight Simulation)는 이용자의 관측점을 3차원 공간 내에서 자유자재로 이동시키면서 주변의 지형과 사물을 살필 수 있게 만든 프로그램을 말한다.  Microsoft 사의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게임 프로그램 Microsoft FS(Flight Simulator)는 수십대의 항공기 모델과 함께 전세계의 지형을 3D 데이터로 수록하여 지구상의 어느 곳도, 그곳의 자연 경관을 실감나게 감상하면서 비행하는 모험을 즐길 수 있게 한다.

  나는 최근 몇 년간 향토문화전자대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 자료센터와 같은 디지털 지식 콘텐츠 개발 사업을 이끌어 오면서, 인문 지식 콘텐츠의 온라인 서비스 형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 왔다.  내 자신에게 끊임없이 제기했던 질문은 ‘지금 쓰고 있는 이 방법이 앞으로도 유효한 방법일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언제나 부정적이었다. 나는 ‘콘텐츠 접근 방법’(Content Access Method)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검색’, ‘콘텐츠 목차’, ‘디렉토리 분류’, ‘키워드 인덱스’, ‘전자지도’, ‘전자연표’, ‘시청각 갤러리’ 등 7가지를 그것의 대표적인 방법(Method)으로 제시한 바 있는데(『지역문화와 디지털 콘텐츠』, 북코리아, 2008. 07),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금까지 해 왔던 것, 현재에 할 수 있는 것을 언급한 것일 뿐, 미래를 내다본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것은 과거의 오프라인 콘텐츠에서 쓰이던 방법론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온라인 환경에 적응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가 열람할 디지털 백과사전은 어떠한 모습일까?

  ‘3차원 가상 현실’은 지금 유저 인터페이스 분야 정보 기술의 대표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경주 남산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경주 남산에 대한 텍스트 기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경주 남산의 구석 구석을 체험할 수 있는 가상의 3차원 공간으로 그를 데려간다는 것이다.

  3D FS는 현재까지 개발된 상용 소프트웨어 중 그와 같은 개념의 가상 현실 인터페이스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3D FS가  오락용 게임에 머물지 않고, 지식의 획득과 교육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이 나의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인문 지식 콘텐츠를 위한 3D FS 개발. 그것은 결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할 요소 기술들이 너무도 잘 마련되어 있다.  언덕이나 바위산 절벽 등을 자연에 가깝게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 지점의 해발 고도를 조밀하게 측정한 수치 데이터가 필요하다. 이러한 데이터를 Terrain Mesh(지형 그물망)이라고 한다. 미국 항공우주국에서는 우주왕복선 컬럼비아 호에서 측정한 지구 전역의 Terrain Mesh 데이터를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게 하고 있다.  (NASA의 Shuttle Radar Topography Mission) Google Earth를 접해 본 사용자라면 그것이 단순히 위성에서 찍은 사진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산과 강 들판을 사실적으로 입체화 시켜서 보여 주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항공 사진과 지형 그물망 데이터를 합성해서 만든 영상이다. Google Earth는 그것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이용자가 특정 지역의 지형 그물망 데이터를 추출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그림 4] 지형 그물망


  Google이 이미 그렇게 했듯이, 지형망 데이터와 위성 영상 또는 항공 사진을 결합하면 (이처럼 실사 영상을 지형 그물망 수치 데이터에 입히는 것을 Photo Real이라고 한다.) 3D FS를 위한 콘텐츠가 만들어 진다. 현재 Google Earth가 제공하는 3차원 영상 지도는 미국과 유럽, 일본의 주요 도시 등에 대해서는 초고해상도의 사실적인 이미지를 제공하지만, 한국 지역에 대해서는 아직 미흡한 수준이다.  그렇다고 마냥 Google이 한국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주기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네이버나 다음이 제공하는 항공 사진은 그 범위가 우리나라에 국한된 대신, 사진의 질은 Google이 제공하는 것보다 우수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대되는 것은 국토지리원이 남한 전역에 대해 50cm x 50cm 지면을 1 화소로 처리하는 고해상도 항공사진을 제작했고, 부분적이지만 이 데이터의 사용을 허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전역의 자연 지형을 입체적, 사실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게 하는 3D FS의 기초 콘텐츠는 이미 다 만들어진 상황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4) 인문 지식을 위한 응용


  내가 이러한 기초 인프라 위에서 하고자 일은 학술적 교육적 의미를 갖는 대상과 그것이 위치한 지점을 찾아서 전국 규모의 데이터가 보여 주지 못하는 디테일을 담아내고, 다시 그 위에서 그와 관련이 있는 다양한 인문 지식 정보를 자유롭게 획득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예시를 보이도록 하겠다.  온라인 상에서 아래에 있는 다섯 컷의 그림을 차례로 클릭해 보기 바란다.

 


  앞의 세 가지는 2011년 가을 한국학대학원 학술답사 때 인문정보학 전공 학생들과 함께 방문했던 제주도 남서부 지역의 3 지점의 디지털 답사기이다.  360° 서라운드  VR과 함께 그곳의 디테일을 보여주는 몇 컷의 사진, 그리고 백과사전 기사 형식의 텍스트 콘텐츠 및 그 지점의 도로교통 지도가 연계되어 있다. 네 번째 것은 앞에서 찾아간 3 지점이 지리적으로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Google 지도이다.  그리고 마지막 것은 이 지역의 자연 지형을 입체적으로 보여 주는 Microsoft Flight Simulator 모의 비행의 한 장면을 오브젝트 VR로 변환한 것이다.  이러한 기능을 모두 하나의 일관된 인터페이스로 통합하고 사실성과 영상미를 획기적으로 향상시켜 ‘가상 현실’이라는 이름에 부합하도록 만드는 것이 나의 구상이다.


  3. 비행 훈련


  ‘가상 현실’은 누군가의 가상이 아닌 실제 체험이 있고 거기에서 사실성 있는 데이터가 만들어져야 구현될 수 있다.  요즈음 애니메이션의 인기 케릭터가 보여 주는 다양한 동작의 상당 부분은 인간의 실제 동작을 모셥 캡쳐 기술로 따온 것이다.   3D FS를 통해 보는 우리나라의 구석 구석이  ⑤번 화면에서 보이는 것처럼 만화적이지 않고 ①~③ 영상처럼 사실적이기 위해서는 저고도 비행 항공기에서 촬영한 실사 사진이 필요하다. 아래의 두 화면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림 5] Photo Real


  두 화면 모두 알프스의 마터호른 주변의 모의 비행 영상으로, 지형 그물망 데이터와 항공사진 영상을 합성하여 만든 것이다. Terrain Mesh가 동일하기 때문의 지형의 굴곡은 100% 똑같다. 그러나 거기에 입힌 그래픽이 달라서 사실성의 완연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앞의 것은 고고도 위성 사진을 기반으로 만든 컴퓨터 그래픽 Texture를 입힌 것이고, 뒤의 것은 비교적 근거리에서 촬영한 실사 사진을 입힌 것이다.

  한국의 지역 문화를 생생하게 담은 하이퍼미디어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내가 스스로 프로그래머가 되고 카메라를 들었던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  내 자신이 직접 경량 항공기의 조종간을 잡기로 했다. 내 생각이 처음 여기에 미쳤을 때에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아서......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된 공부를 해 가는 서너 달 사이, 내가 하늘에 올라가야 할 이유가 점점 더 분명해졌다. 내가 하지 않아도 언젠가 누군가가 할 일이겠지만, 지금 내가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경량 항공기 조정 면허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4 과목의 필기 시험, 20시간 이상의 비행 실습(단독 비행 5시간 이상 포함), 그리고 마지막 관문인 실기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비행 교육은 6월부터 시작했지만, 여름 내내 비오는 날이 계속되어 훈련을 미뤄야 했다. 집중적인 비행 실습은 9월, 10월의 청명한 가을 날씨 속에서 이루어졌다.  단독 비행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조정 능력을 확보하고 학과 시험, 실기 시험을 통과해 면허를 취득하기까지 6개월이 소요되었다.


[그림 6] 경량 항공기

  위의 사진들은 우리나라에서 경량 항공기로 분류되는 비행기들이다. 비교적 비행기답게 생긴 것도 많이 있지만, 내가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비행기보다 글라이더에 가깝게 생긴 마지막 사진의 모델이다. 미국 Quick Silver사의 제품.  두 달 전 국내에 중고 매물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구매 의사를 전달했지만, 나보다 서두른 사람이 있어서 아깝게 놓친 기종이기도 하다. 내가 이 비행기를 사려 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가족들은 경악했다. 공군 장교인 아들(비행기 타는 것과는 무관한 일본어 통역 장교)은 선회하다가 떨어질 것을 염려했고, 겨울철 바이크 투어의 혹독한 시련을 경험한 바 있는 딸은 하늘에서 얼어 죽지 않겠냐고 걱정했다.  내가 이 비행기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저속 비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항공기는 일정 속도 이상을 유지해야 양력(揚力)을 받아 떠오를 수 있다.  속도가 떨어지면 양력 또한 감소해서 추락하게 되는데, 이를 실속(失速, stall)이라고 한다. Quick Silver 기종은 실속을 피할 수 있는 최저 속도(stall speed)가 가장 낮은(32 mph) 비행기 중의 하나이다.  저속 비행이 가능하다는 것은 카메라에 담을 지상의 목표물에 그만큼 가까이, 여유있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 할 일? 그것은 지금 구상 중이다. 항공기와 항공 촬영 장비를 구입하는 일부터가 만만치 않고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일 테니까, 그것을 가지고 할 일에 대한 계획은 천천히 신중하게 마련해도 될 듯하다. 


인내심을 가지고 이 글을 읽어 주신 독자들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 드리고자 한다. 아래의 사진을 클릭하면 제주도 해안지대의 18곳을 비행기로 돌아볼 수 있게 하는 모의 비행 프로그램이 구동된다. 2011년 가을 한국학대학원 인문정보학 전공 학생들과 함께 제주도를 다녀와서 만든 디지털 답사기를  Google Earth API 기반의 응용 프로그램에 탑재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Google이 제공하는 API 샘플 프로그램 "Monster Milk Truck"과 여기에 다양한 기능을 추가한 Chrisdiamanti.com의 소스 코드를 일부 수정하여 만든 것이다. 비행기의 조종 방법은 화면 하단에 설명하였다. 제주도의 자연과 문화를 하늘에서 보는 재미를 느끼시기를 .....